87년생 수컷의 인생저장소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유산. 창원

요즘 보궐 선거로 인해 떠들썩한 도시 창원. 


모든 선거가 늘 그렇듯 말도 많다. 아침에 병원을 들려 잠깐 뉴스를 보니 현재 후보자들 중에서 지지율 1위는 자유한국당의 후보이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투표라는게 원래 표를 다 까봐야 결과를 아는 것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당선이 유력해 보인다.


민주당의 정치적 꼼수로 2위를 달리고 있는 정의당의 후보와 후보 단일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적 행보인지 단순하게 한국당을 밀어내기 위한 더러운 수작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보궐선거로 인해 씨끌벅적한 도시 창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 창원.


창원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겠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창원이 계획도시인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누가 만들었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현재는 마산,진해와 합쳐져 흔히 마.창.진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름답고 참 매력적인 도시 창원.



오늘은 그 창원이 어떻게 발전을 하게 되었는지, 창원이 생기기까지에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973년

 

 때는 1973 년 박정희 대통령 집무실.


 

야당의 반대로 수도 이전 계획이 무산 되었을때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도를 대신할만한 도시계획을 하나 세우게 된다.

 

첫째. 공업단지가 몰려있어야 한다.

둘째.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여 적들에 공격으로 부터 방어가 좋아야 한다.

셋째. 대도시가 가까이 있어야한다 .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된 지역은 바로 의창(義昌)이다.



대규모 공업단지가 있으며

  

 

주변이온통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



대도시인 부산이 매우 가깝게 위치해있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퇴임하기 전, 최첨단 공업도시인 창원과 핵무기를 공개하고 퇴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원하던 입지조건이 갖추어지자 창원의 공사명령은 바로 떨어졌고 바로 공사 착수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발전이 거의 되지 않고 지역의 거의 모든 곳이 논과 밭으로만 이루어진 엄청난 촌동네였던 창원은,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논과 밭을 전부다 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논과 밭을 밀기 전 마을사람들은 직접 현장 답사를 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내년 추수까지만 논과 밭을 밀지말고 기다려 달라고'

  

박정희 대통령은 주민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1979년

 

1979년 10월 창원에선 대대적으로 벼를 베고 추수를 하기 시작했고, 추수를 마친 지역에서는 공사 착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 되는 듯 하였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 가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 세력들의 뜻대로 암살에 성공을 하게 되고, 대한민국은 불행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1980년

 

그 이후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전두환이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정치계에 처음 발을 들인 전두환은 불안정했고 민주화 세력들의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많은 질타와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민주화 세력들에게 넘어갈 것을 불안해하던 전두환은 특단의 조치로 김대중을 체포하고 5.17 비상계엄령을 발령한다 .

 

그 후 5.18 광주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


 6월 초

 

수 개월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던 창원계획도시는 전두환의 손에 다시 시작되어 빛을 바라게 된다.

 


창원 시청을 개청 하고 .


  

현재 창원의 랜드마크라고 불리는 창원광장을만 들었다. 이 원형 광장은 완공당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원형광장이라고 한다. 

 

창원시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비로소 박정희 대통령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전두환은 창원시민들과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을 위해 주공아파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의료 혜택을 위해 창원 병원을 만들었다.

 


 1973년


시민들의 안정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위해 창원종합운동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등교육을 위해 대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이 후 이 학교는 창원국립대학교가 된다.


 

바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85년 



창원은 확실히 커졌고 많은 발전을 했다.



공업단지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창원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있다.

 

 1990년 

 

 

전두환은 1988년 자신의 임기를 끝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이어 받아 창원을 완벽한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창원 종합 운동장이 완공 되고, 창원 국립 대학교가 생겨나고, 최신식 공업단지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창원사람들은 매우 행복해 했다.

 

 2000년


 

창원공단의 입주업체는 국내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노키아, 아우디 등등 세계적인 외국 기업까지 다양하게 입주했다. 당시 창원의 물자 생산량은 경남 총생산량의 47%를 차지할 만큼 엄청난 모습을 보였다.



 

 

창원의 큰 발달로 인하여 교통량도 크게 증가하여 도시 철도 를 만들려고 했으나 도시철도는 예산문제로 2001년 중단 되었다.



 2010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창원의 시티세븐

 


세계 최고의 유흥업소 밀집지역이라는 상남동

 

 

경상남도 총 생산량의 47%를 생산하는 거대한 최신식 공업단지.



다른 도시들보다 아름답지는 않을지 몰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수도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도시 창원.



플레이스토어에서 "87년생 수컷" 을 검색 해보세요!




댓글 보기

  1. 2019.03.31 10:33

    비밀댓글입니다

TOP